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부 사이드 칸 (문단 편집) === '친정' === [[파일:아부사이드 동전.jpg|width=700]] 아부 사이드 칸의 은화 큰 대가를 치르고 사랑을 이룬 아부 사이드는 하산 잘라이르에게 --NTR의-- 보상으로 추판이 맡던 대장군 직을 하사하였다. 내정에 있어 아부 사이드는 일전에 숙청된 라시드 앗딘의 아들 기야스 앗딘을 재상으로 기용하였고, 추판 가문 숙청에 공을 세운 키토부카의 손자인 나린 타가이와 삼촌 알리 파드샤는 각각 호라산과 바그다드 총독으로 봉해졌다. 다만 기야스 앗딘의 중앙 집권화 정책은 지방 아미르들의 반발로 이어졌고, 1329년 나린 타가이는 총독위를 사임하고 재상에 반대하는 움직임에 나섰다. 알리 파드샤와 미스르 카자 등의 아미르들이 그를 지원하였으나, 나린 타가이는 결국 그해 여름 처형당하였다. 외교에 있어 아부 사이드는 1320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무역 협정을 맺고 제국 전역에 예배당을 세울 수 있게 허가하였다. 1322년에는 맘루크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어 반세기 넘게 이어진 양국 간의 대립을 매듭짓고 서아시아 교역을 활성화하였다. 그외에 델리의 [[투글루크 왕조]]와도 종종 교류하였다. 한편 추판의 사후 왕비 바그다드 하툰과 재상 기야스 앗딘은 칸의 총애를 두고 다투었고, 후자는 바그다드 하툰이 전남편인 대장군 하산 잘라이르와 반역 모의를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로써 1331년 하산 잘라이르는 체포되었으나 그 모친이자 칸의 고모인 올제테이가 탄원하여 처형 대신 [[에르진잔]] 서쪽의 케마 성채에 감금되었고, 이후 무혐의가 밝혀지자 룸 총독으로 봉해졌다. (1332년) 다만 아부 사이드는 이듬해 바그다드 하툰과 이혼하고 그녀가 데리고 있던 데마스크 카자의 딸 딜샤드 하툰과 결혼하였다.[* 두 추판 가문의 여인은 모두 부친 혹은 남편을 죽인 왕과 결혼하는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1334년 아부 사이드는 아미르 무사파르 이나크를 쉬라즈 총독에 봉하였는데, 이에 추판 가문의 숙청 후 파르스를 지배하던 샤라프 앗딘 마흐무드샤 인주가 반발하였다. 마흐무드샤는 무사파르를 추격하다 아부 사이드의 막사까지 이르는 불경을 범하였고, 칸의 목숨을 위협한 반역죄 혐의로 투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